서울대 보건대학원 직업환경건강 연구실

Occupational & Environmental Health Lab

"스무 살 때 친구들과 함께 전북 부안에 있는 작은 산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.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처음 봉기한 산이었습니다.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죽창을 들고 모인 동학도와 농민군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. 멀리서 바라보면 다 함께 일어선 그 모습이 하얀 산처럼 보였다고 해서 그 이름이 백산白山이 된 산이었습니다. 

직접 찾아간 백산은 산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작은 언덕이었습니다. 1894년 3월 하순 봉기의 날 이전까지 누구도 높이가 채 50미터가 되지 않는 그곳을 산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. 아이들이 뛰노는, 일하다 지친 이들이 한 번씩 숨을 돌리는 언덕이었겠지요. 

이후 백산을 떠올릴 때마다 묻곤 했습니다. 어떻게 그 자그마한 언덕이 존엄하게 살고 존엄하게 죽고자 하는 사람들의 꿈을 감당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요.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었던 그 일상성 때문이었을까, 아니면 언제든 오를 수 있었던 그 낮음 때문이었을까. 제 공부가 어떤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백산으로부터 배우고 싶었습니다. 

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은 다양한 관점이 각축하는 전장입니다. 저는 그 관점들이 모두 동등한 수준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.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눈길을 주고, 권위에 굴하지 않고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, 여러 가설과 경쟁하며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관점들이 그렇지 못한 관점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의미를 준다고 믿습니다. 그리고 당장은 사소해 보일지도 모르는 그 차이를 분별해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. 그 차이가 먼 훗날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간격이 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입니다."

- <우리 몸이 세계라면> (김승섭, 2018) 서문 중 -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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